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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는 어미와 떨어져 주인과 사는게 기쁠까 슬플까?

김익수 2010. 8. 30. 00:37

어려서 뽀삐라는 암컷 치와와를 키운 적이 있다.
어느 날 뽀삐가 예쁜 새끼 강아지를 두 마리 낳아서 젖 뗄 때를 기다렸다가 한 마리를 이웃에 분양했다. 분양하던 날, 이웃 주민이 와서 새끼를 끌어앉자 뽀삐는 본능적으로 매우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좌불안석으로 어쩔 줄 몰라하던 뽀삐의 우려대로 그날 뽀삐의 사랑스런 아기는 이웃주민의 품에 안겨 현관문을 나섰고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뽀삐는 그 순간부터 열흘 가까이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현관문을 뚫어져라 쳐다보곤 했는데, 그 때 뽀삐의 그 슬픈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세월이 흘러 우리 아이들이 그 때 내 나이가 되었을 즈음 말티즈 한 마리를 분양받게 됐다. 공교롭게로 이번에는 내가 어릴 적 이웃 주민의 입장에서 분양받는 신세가 됐는데, 영락없이 어미 말티즈가 다가와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새끼 주변을 맴돌며 연신 핥아댔다. 그 어미를 뒤로 하고 샵을 나오는데 마음이 너무 불편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누가 나에게 저 모자를 생이별하게 할 권리를 부여했는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미안하기가 그지 없었다.

미안하게도 우리 또리(분양받은 우리집 강아지)는 분양 후 석 달이 다 되도록 제 어미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다행히 지금껏 잘 적응하고 있지만, 가끔씩 나를 멍하니 쳐다볼 때는 그 해맑은 눈망울이 이상하게도 처량하고 애처롭게 느껴져서 미안한 마음이 절로 든다. 인간이나 개나 따지고 보면 똑같은 세포체인데 내가 시냅스가 좀 더 잘 된 두뇌를 가진 인간이라는 이유로 녀석을 그저 개취급 할 수 있는가,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여느 집 강아지가 다 그런 것처럼, 또리도 식구들이 다 곯아떨어진 야심한 밤에 내가 집에 들어올라치면 잽싸게 뛰어나와 나를 연신 핥아댄다. 강아지가 외출했던 주인을 맞을 때 얼마나 감정에 복받쳐서 반갑게 달려드는지 키워 보지 않은 사람은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또리가 항상 그렇게 일관된 태도로 나와 우리집 식구들을 대할 때마다, 만약 세상의 강아지들이 말을 하는 동물이라면 인간들이 고맙고 미안해서 절대 함부로 대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런 나를 보고 내 친구는 또리를 호적에 올리라고 하는데, 정말이지 호적에 강아지를 올릴 수 있도록 제도가 바뀐다면 강아지를 '아기'라고 부르는 세상의 애견가들이 자신의 아기를 호적에 등재하는 일이 실제로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애견가들은 그런 고맙고 미안한 마음 때문에, 강아지를 자신들 옆에 두면서도 불쌍하고 애석한 마음을 함께 갖는지 모른다. 그래서 '동물'이란 표현을 쓰면서도 접두사로 '반려'란 표현을 넣어 스스로를 합리화 하고 강아지를 위로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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