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끄적이는
리비아 외교관 추방사건, 정부 엠바고 요청한 이유는? 본문
리비아 정부의 한국 외교관 추방 사건이 뒤늦게 불거졌다. 관련해서 리비아 언론은 이미 지난 6월 관련 보도를 했음에도, 우리 정부는 언론에 엠바고를 요청해 지금껏 보도를 자제토록 한 것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언론이 뒤늦게 엠바고를 깨고 리비아 외교관 추방 사건을 보도한 것은 정부가 엠바고 유효기간을 종료시킨 때문이 아니라 트위터에 이 내용이 올라와 더 이상 엠바고가 의미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관련해서 일각에서는 트위터, 페이스북 같은 소셜네트워크가 전세계를 뒤엎고 있는 요즘같은 세상에 정부와 언론이 엠바고로 합작해서 쉬쉬하고 있었다고 비판하는 시각도 있는 모양이다.
여기에 최근 미국에서 발생한 위키리크스 기밀폭로 사건과 비교해 국내 언론의 알권리 차원 보도가 너무 소극적인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을 수 있다.(유사한 이유로 엠바고는 과거에 비해 줄어들고 있다.) 게다가 엠바고가 국익 때문에 지켜질 필요가 있다 하더라도 그 국익이라는 것이 '국가적 국익'을 말하는 것인지, 단지 '현 정부의 국익'을 말하는 것인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있을 수 있다.
아무튼 엠바고란 것이 국익과 관련해 복잡한 배경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국익과 언론의 알권리 차원에서 어떤 갈등 요인들이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것이 궁금한 분들은 아래 내용을 보시라. (일전에 게시한 글이지만 다시 한번 올린다)
‘국가ㆍ정부ㆍ언론의 3자 관계’
- 국가ㆍ정부ㆍ언론의 관계설정과 갈등 및 조화의 지점 –
1. 언론자유와 통제
언론이 절대적 자유를 가지는가, 통제적 범위 내에서 자유를 추구하는가 하는 문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언론에 작용하는 외적통제(정치체계, 경제체계, 사회체계, 문화체계 등)의 관계에서 언론의 역할이 일부 제한적이게 되거나 충돌할 수 있고, 또 그러한 충돌이 상황에 따라 국가 또는 정부의 이익(국민적 이익)과 충동할 수 있음을 감안할 때 언론에 가해지는 일정한 통제는 반드시 권위주의적 산물이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언론의 건강성을 담보하는 것이며, 워싱턴포스트 등 서구의 글로벌 미디어들이 미국의 입장의 감안하고 조율하여 ‘미국의 국익에 기반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처럼 국가ㆍ정부ㆍ언론의 측면에서 3자의 역할을 분업화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언론자유는 상대적, 사회적으로 신탁 또는 공탁(국민의 자유를 언론에 위임한)된 것이다. 따라서 언론의 자유는 미국 수정헌법 1조와 같이 헌법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든, 그렇지 않든 ‘국민의 알권리’ 차원에서 절대적으로 보장되고 보호되어야 한다. 하지만 언론의 사회책임이론 측면에서 언론은 책임을 수반하는 권리를 수반하여야 하고, 같은 맥락에서 언론이 갖는 정보기능, 교육기능 등 6가지 기능도 이러한 책임의 범주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은 국가 또는 정부 차원의 관계 형성을 통해 언론의 역할이 사안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며, 상호 조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암시한다.
이미 언론의 ‘알권리’는 美 펜타곤 페이퍼의 사례에서와 같이 국익의 관점과 충동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에 언론은 뉴욕타임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보도가 되었을 때’와 ‘보도되지 않았을 때’ 국가와 국민에 단기적 or 장기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또 단기적 or 장기적으로 어떤 득실을 가져오게 될 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언론의 갖는 ‘국민의 알권리’는 다른 어떤 권리에 앞선 것일 수 있으며,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미디어의 가장 큰 의무이자 권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언론은 이런 모든 경우마다 ‘국민의 알권리’를 앞세울 수는 없다. 국가ㆍ정부ㆍ언론, 나아가, 국민의 입장에서 막대한 손해를 끼칠 사안을 ‘알권리’만으로 보도한다는 것은 국익적ㆍ공익적 관점에서 절대 이득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유능한 정부가 늘 언론을 통제하려고 한 것처럼, 국민의 알권리를 항상 국익적 관점에서 판단할 수는 없다. 바로 이런 요인으로 언론은 사안에 따라 국가ㆍ정부ㆍ언론의 3자 관계를 모색하여야 하며, 궁극적으로 어떤 결정이 조화로운 지점인가를 살펴야 한다.
2. 국익과 미디어의 역할 - 워싱턴포스트의 사례를 중심으로
2.1 언론자유와 국익을 생각한 워싱턴포스트 사례
‘언론 女帝’로 불리는 월스트리트저널의 全 사주, 캐서린 그레이엄은 ‘독립언론’을 이룬 발행인으로 손꼽힌다. 캐서린 그레이엄은 20세기 최악의 전쟁 중 하나로 꼽히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美 국방부 기밀문서인 ‘펜타곤 페이퍼(Pentagon Papers)’의 보도와 닉슨 대통령을 끌어내린 ‘워터게이트(Watergate) 사건’ 보도에서 알 수 있듯이 국가와 정부의 이익에 앞서 ‘언론의 독립’과 ‘알권리’를 먼저 수호한 발행인으로 꼽힌다. 물론 워싱턴포스트가 ‘독립언론’으로 확고한 자리를 굳히기까지는 미국 역대 최고의 편집국장으로 꼽히는 벤 브래들리 국장이 있었지만, 캐서린이 편집국에 절대적인 힘을 실어주면서도 역대 대통령과 정치인들과의 관계 형성을 통해 미국의 국익과 공익적 가치를 만드는 데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2.2 ‘국익의 사회적 담론’에 참여한 워싱턴포스트
실제로 워싱턴포스트는 객관보도를 비교적 철저하게 지켜온 언론으로 분류되지만, 미국의 국익적 관점에서 미국의 의사결정에 일정한 역할을 해왔다.(김택환, 조지타운大, 2001) 실제로 캐서린은 닉슨, 클린턴, 부시로 이어지는 역대 대통령과 정치인, 사회 각계 인사를 자신의 저택을 꾸며 만든 라운드 테이블 형태의 살롱에서 주기적으로 만나면서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등의 방면에 입김을 행사해 왔고, 이는 곧 미국 사회의 엘리트 계층에서 형성되는 ‘국가적ㆍ사회적 담론’ 형성에 관여해 왔음을 암시한다. 이 모임의 멤버였던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M. 다우드에 따르면, 이 라운드 테이블에는 한번에 12명 정도가 초대되었으며 이 중에는 정치인이 한두 명씩 끼곤 했다. 이 모임은 모든 사안에 대해 ‘오프 더 레코드’를 전제로 흉금을 터놓는 자리였는데, 이곳에서 워싱턴의 역사가 만들어졌으며, 바로 그런 기능으로 인해 캐서린의 집은 ‘워싱턴의 핵심’으로 인정받기에 이른다.(김택환, 조지타운大, 2001)
2.3 통제ㆍ자유 양쪽에 대한 워싱턴포스트의 조화 정책
김택환은 캐서린이 이 라운드 테이블을 자신의 사교와 워싱턴포스트의 발전을 위해 적절히 활용했다고 전한다. 그러면서 이 모임에서 얻은, 미국 사회를 이끄는 엘리트들이 형성한 ‘미국의 국익에 기반한 메시지’들을 편집국에 정보와 힌트 현태로 주어 기사화 하도록 측면지원을 한 것으로 워싱턴포스트 기자들은 말한다.(김택환, 조지타운大, 2001) 이는 워싱턴포스트가 캐서린이라는 사주의 영향 아래 통제를 받았음을 암시하는 대목이지만, 브래들리가 장악한 편집국에 입김을 행사했다기보다는 단지 기자의 취재에 도움을 줄 ‘Source’ 정도만 전달함으로써(하지만 강력한 사회적 아젠다를 형성함) 사주에 의한 통제를 최소화 하는 한편, 언론의 자유와 편집권을 존중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캐서린의 사례는 미국이라는 국가의 이익과 그 관계 당사자들(정치인, 정부관계자, 언론인)이 어떻게 갈등을 해소하고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 하나의 사례를 제시한다.
물론 언론이 대통령과 정치인, 정부관계자 등과 캐서린과 같이 저택에서 라운드 테이블 모임을 갖는 경우, 언론의 독립적 지위가 약화될 수 있고, 사주가 국가 엘리트들 모임에 깊숙이 관여함으로써 필요 이상으로 편집국에 관여할 수 있다는 문제가 있다. 또한 이른바 ‘정실정치’와 ‘정실언론’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 있다. 게다가 사주가 이러한 국가적으로 영향력이 큰 인사들과의 관계 속에서 과연 객관적 입장을 견지할 수 있으며, 편집국의 독립(언론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부분에 있어 캐서린은 펜타곤 페이퍼와 뒤이어 터진 워터게이트 사건에서 보여주듯, 심지어 워싱턴포스트의 존폐가 걸려있는 문제에 있어서까지 기자들과 편집국을 대신해 언론의 자유를 수호하고 정부의 통제를 적극적으로 방어하는 발행인의 모습을 보였다. 실제로 워싱턴포스트는 당시 닉슨 정권이 가하는 여러 위협에 직면해 존폐의 기로에 섰지만, 정부의 강력한 세무조사와 방송국 허가권을 갱신해 주지 않겠다는 협박, 제3자로 하여금 워싱턴포스트 주식을 사게 해 경영권을 빼앗으려는 시도와 주가 폭락 조작 등의 위험을 초래하면서까지 언론자유와 ‘국민의 알권리’를 우선으로 내세워 기자들과 편집국을 대신해 정부와 싸웠다.(김택환, 조지타운大, 2001) 이것은 근본적으로 국가와 정부의 언론통제 속에서 언론자유를 수호하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펼쳐나갔지만 한편으로 국가의 이익과 미국 사회의 합의된 가치(America System)의 측면에서는 적극적으로 타협하고 조화를 이루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3. 자유주의 모델의 국가ㆍ정부ㆍ언론의 견제 및 균형점
자유주의 관점의 모델에서 국가ㆍ정부ㆍ언론의 3자 관계는 ‘삼각형 관계’를 형성한다. 이 모델에서 정부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 국민으로부터 합법적 권능을 위임받은 국민적 기관이 되며, 언론 역시 국가의 이익을 위해 도덕적 권능을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기관이 된다. 이 경우 정부와 언론은 기본적으로 국가의 이익에 대해 목적적 갈등은 없다. 다만 정부와 언론간의 갈등은 어떻게 하면 국가의 이익을 극대화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방법론적(수단적)’ 부분에 있어 갈등이 존재한다. 이는 민주주의의 방법적(수단적) 다원주의에 입각했을 때 원칙적으로 “수단과 방법에 있어 정부와 언론은 적극 수용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수용하며, 이는 누가 더 힘이 센가 하는 측면에서는 무의미한 이야기가 된다. 따라서 이런 측면에서 정부와 언론은 궁극적으로 국가의 이익에 관한 동반자적 관계가 되며, 상호 견제와 균형을 이룰 때 역동적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3.1 정부와 언론의 갈등 지점
정부와 언론의 수단적 갈등은 정부가 언론에 기밀주의를 강조할 때, 언론은 공표주의를 강조함으로써, 정부가 하부구조를 내세우면 언론이 상부구조를 내세움으로써 발생한다. 이것은 특정 사안에 있어 갈등의 지점을 야기하는 것이지만, 상호 견제의 효과적 측면에서 장점이 있다. 정부와 언론의 갈등은 상호 인식적 차원의 갈등과 규범적 갈등, 취재인식 차이의 갈등, 상호관계 차원의 갈등 등으로 구분된다.
예컨대 상호 인식적 차원의 갈등에서 언론의 자아(Self Image)는 타상과 차이가 있으며, 이러한 자상과 타상의 타이는 갈등의 씨앗이 된다. 또한 언론에 대한 정부의 기대치와 언론의 생각이 다를 때 이러한 인식상의 갈등이 있을 수 있다. 취재인식 상의 갈등은 예컨대 언론이 정부를 감시의 대상으로 보는 반면, 정부는 정보의 주요기관이라고 보는 관계 설정에 있어 갈등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정부와 언론의 갈등으로 빚어지는 부작용은 정보의 왜곡과 손실, 소수인의 영향력 증대, 전문화와 제도화의 손실, 대국민과의 관계에서의 손실, 국익의 손해 등으로 파생된다.
3.2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정부와 언론은 상호 갈등을 유발한다. 하지만 국가의 이익 관점에서 이러한 갈등은 반드시 조화를 이루어야 하고, 조화지점에 대한 이해의 공유가 형성되어야 한다. 이것은 앞서 사례로 언급한 워싱턴포스트의 전 사주 캐서린 그레이엄의 예처럼 국가의 이익에 관여하는 정치ㆍ경제ㆍ사회의 엘리트 계층의 담론에 언론이 참여하는 형태가 있을 수 있으나, 이러한 분파적이고 행동규범적인 것으로 항상 3자간의 조화 지점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정부와 언론의 갈등 및 그에 따른 부작용을 감안한 조화지점을 찾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정부ㆍ언론이 조화를 이루는 길
1. 정부ㆍ언론 모두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기관이라는 점을 인식
2. 흑백논리의 극복 : 제로섬 게임 또는 흑백논리가 아니라고 생각해야
(정부 또는 언론의 일방 또는 모두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상호 인정 필요)
3. 진실을 향한 충성을 가져야
4. 공포주의가 기밀주의보다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
5. 서로의 기능이 자신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인식 (기능의 인식)
6. 전문화ㆍ제도화에 대한 향상 노력
언론자유와 법적 규제
국가ㆍ정부ㆍ언론의 3자 관계 형성에 있어 언론의 법적 장치는 갈등을 최소화하고 일정한 조화지점을 찾도록 하는 최소한의 방책이 된다. 하지만 언론에 있어 법적 장치는 존재성과 권리를 담보하는 장점이 있는 반면, 오히려 그 권리를 침해당하거나 통제를 당하는 역효과를 낳을 수도 있다. 따라서 언론자유와 법적 규제는 신중하게 접근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법은 시대를 막론한 그 시대의 공동규범이라는 인식과 ▲사회가 법의 객관성과 존재성을 규정한다는 인식 ▲언론은 사회 각 요소를 연결하는 기능을 한다는 인식(언론의 신경계통작용) ▲법과 사회는 상호 영향을 받는다는 합의된 인식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언론과 법의 관계는 ▲1단계-법이 언론에 무관심한 시대(자유방임적 사조) ▲2단계-법이 언론을 통제하던 시대(권위주의적 통제사조) ▲3단계-법이 언론에 자율을 주던 시대(자유주의적 사조) ▲4단계-언론자유와 공공복리를 조화하는 시대(사회책임적 조화 사조)의 과정을 거쳐 왔다. 이런 측면에서 현 시대가 4단계 사회책임적 조화 사조에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언론과 법의 관계도 참여자 관계와 책임관계, 감시관계, 사회교육관계 등의 기능적 특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국가나 정부는 언론의 이러한 기능적 특성을 이해하고 상호 견제와 동반자적인 작용을 한다는 것을 인식하여야 하며,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법 제정 및 운용에 나서야 한다.
아울러 권력을 가진 자가 역사적으로 언론을 통제하려 해왔다는 점을 인식할 때, 언론통제를 상징하는 법을 제정하여 갈등을 초래한다든지(예: 신문법 17조 등), 언론사 경영에 간섭하여 정치력을 동원한 경제적 통제에 나서는 등의 권위주의적 발상을 하여서는 곤란하다.
‘국익’ ‘국가의 함의된 가치’에 대한 언론사의 인식 강화
또 한 가지는 국익에 기반한 ‘국가의 함의된 가치’가 무엇이고, 이에 따른 언론의 역할과 자세를 향상시키는 언론기관 내부 차원의 인식 강화와 전문화된 교육체계(Professionalization Education)를 들 수 있다. 이미 뉴욕시립대 언론정보대학원 등 서구의 대학에서 이러한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데, 국내의 경우는 대학과 언론기관 모두 관련 교육체계가 마련돼 있지 않다.(김성해, 2008)
국가ㆍ정부ㆍ언론의 3자 관계 모색과 ‘국익’ 관점의 언론의 역할을 생각해 볼 때, 사회적, 국가적 담론을 생산하는 언론사 내부 기자들의 폭넓은 시야와 식견 형성, 국익에 대한 함의된 가치형성 및 국가ㆍ정부ㆍ언론 3자의 입장에 대한 전문화된 교육은 필수적이다. 민주주의 틀 안에서 기사는 ‘민주주의’라는 범주 안에서 합목적성을 띄어야 하는 것처럼, 기자는 거시적 또는 미시적 담론을 다룸에 있어 사회적, 국가적 ‘틀’ 안에서 국가적 이익과 부합하는지 살펴야 하고, 그 ‘틀’ 안에서 우리 사회의 합의된 가치들을 일반 대중에 알릴 ‘의무’를 가진다. 하지만 흔히 ‘기자들은 호흡이 짧다’고 얘기하는 것처럼, 한국의 기자들은 사건이나 사실 그 자체에 집중할 뿐, 거시적인 안목을 갖고 있지 못한 측면이 있다. 이는 자칫 미디어가 큰 사회적 이슈나 글로벌 이슈를 다룸에 있어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계몽하지 못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국익에 대한 기자들의 함의되지 않은 가치인식은 표면상으로 생각의 다양성을 나타내지만, 예컨대 글로벌 금융위기 등을 다루는 세계의 무대에서 볼 때는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스 등 미국의 언론이 그러한 것처럼, 한국의 미디어들도 국익이라는 측면에서 일관된 메시지 전략을 취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국가와 정부, 언론의 통제적 측면에서 벗어나 3자가 ‘국익’이라는 측면에서 ‘함의된 가치’를 존중할 필요가 있음을 의미한다.
4. 결언
신문ㆍ방송ㆍ통신 등 언론은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적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영향력을 행사한다. ‘국민의 알권리’는 절대적 권리이며, 이러한 측면에서 언론은 하나의 권력 축을 형성한다. 하지만 언론이 엘리트 계층의 산물이었고, 그것이 대중화 된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면 지배계급이 언론에 미치는 영향력이나 통제는 일정한 균형점 선상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모든 권력(정치세력)은 미디어를 통한 프로파간다 전략에 의해 대중을 장악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것은 지배계급의 이익에 동원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국익적인 측면에서 언론은 이데올로기를 확산하고 유지시키는 역할을 한다. 우리가 민주주의, 자본주의라는 일정한 틀 안에 존재하는 것처럼, 미디어 역시 그러한 틀 안에서의 가치를 갖는다. 따라서 언론은 국익의 관점과 지배계급의 이해, 대중(국민)들의 이해 사이에서 조화의 지점을 찾아야 하고, 이를 통해 언론자유를 수호하면서 정치ㆍ사회적인 견제자가 되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미디어의 위력을 가장 먼저 간파한 사람은 러시아 혁명가 레닌이었다. 그는 「무엇부터 시작할 것인가」라는 제하의 논문에서 『신문은 비단 집단적 선전자, 집단적 선동자일 뿐 아니라 집단적 조직자』라는 유명한 명제를 제시했다. 하부구조의 상부구조 결정론에 입각한 마르크스의 소극적 언론관과 달리 이것은 언론 그 자체를 혁명의 수단이자 주체로 규정한 것이다. 이러한 언론관은 이후 모든 공산정권에 있어 신문뿐 아니라 영화 라디오 TV 등 매스 미디어 전반에 적용되는 전체주의적 언론통제의 패러다임으로 발전했다. 레닌에 대중선동가로 천재적이라는 평을 듣는 아돌프 히틀러도 미디어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천재적 대중선전 기술로 대중을 광기로 몰아넣는 파시즘 체제를 만들었으며, 이를 토해 나치당 의석수를 4년만에 20배나 늘릴 수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 외에 전체주의 정권이나 공산주의 정권의 언론장악 역시 미디어를 선전에 이용하여 접근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없다. 스탈린은 언론을 강력한 통치수단으로 활용했으며, 중국의 마오쩌둥은 중국혁명의 양대지주를 「붓과 창」, 즉 선전·선동과 무기로 규정하며 언론을 활용했다.
언론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데는 전체주의 국가나 공산주의 국가뿐 아니라 민주주의 사회 체제에서도 같은 양상을 보인다. 1930년대 美 루스벨트 대통령은 대공황에 직면하자 언론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는 매일밤 라디오에 출연해서 직접 연설을 했다. 이로 인해 「권력은 TV에서 나온다」는 말이 등장하기도 했다. 케네디 대통령도 젊은 나이에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로 TV를 활용한 선거혁명을 들 수 있다. 이어 할리우드 출신인 레이건 대통령도 뛰어난 화술과 용모, 매너로 유권자들을 사로잡으며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TV가 만들어낸 신화」로 불렸다.
기본적으로 국가와 전체주의 정권, 공산주의 정권, 민주주의 정권 등 정치체계를 불문하고 언론을 하나의 권력 축으로 인식하거나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전략을 펼친다. 이 과정에서 언론자유와 통제의 갈등이 유발되며, 이를 얼마나 조화롭게 할 것인가가 늘 과제가 된다. 이런 측면에서 국가ㆍ정부ㆍ언론의 3자 관계는 기본적으로 견제와 갈등의 관계이며, 통제와 자유를 시각차를 유발한다.
4.1 ‘국익’에 대한 3자의 관계
기본적으로 국가ㆍ정부ㆍ언론의 통제 및 언론자유의 측면에서 선행되어야 할 하나의 시각은 ‘국익’에 대한 ‘국가적 함의’다. 이것은 미국과 같은 지배국가가 자국의 엘리트 계층에 의해 생성된 국가적 함의를 미디어를 통해 국제사회에 전파하고, 이를 통해 자국의 이익을 반영하는 것과 맥락이 있다. 이는 워싱턴포스트의 발행인이었던 캐서린 그레이엄이 자서전에서 자신의 저택에서 역대 대통령들과 정치인, 오피니언 리더들과 ‘라운드 테이블’을 통해 정보를 교류하고 공유했다고 밝힌 것에서 하나의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캐서린이 미국의 ‘합의된 가치’를 워싱턴포스트 기자들에게 정보로 흘려 궁극적으로 지면을 통해 ‘합의된 가치’가 보도되도록 한 것은 미국이라는 국가의 이익 측면에서 언론이 참여하고 일정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4.2 국가ㆍ정부ㆍ언론 3자의 갈등과 조화 지점
정치 권력자들은 언론을 통해 지배가치를 확산하고 통제하고 싶어 한다. 언론은 이 과정에서 견제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들 3자의 관계는 이런 점에서 통제와 견제의 균형점을 찾는 여러 장치들(법제도, ‘언론자유’에 대한 보편적 가치인식, 언론의 사회책임적 관계 인식, 언론조직 내부의 인식 제고 등)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경우에 있어 국가ㆍ정부ㆍ언론 3자는 ‘국가의 이익’이라는 ‘합의된 가치’를 존중해야 하고, 그러한 틀 안에서 ‘통제’와 ‘자유’를 해석하여야 한다. 물론 ‘국민의 알권리’와 ‘국익’의 측면에서 어떤 결정이 우리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지를 판단하는 일은 쉽지 않다. 또한 이 과정에서 특정한 경우는 통제의 범위가 확대되거나 언론자유가 축소될 수 있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로, 국민의 알권리로 인해 ‘국가의 이익’이 침해될 수도 있다. 이런 측면에서 워싱턴포스트의 발행인 캐서린 그레이엄이 편집국의 독립성과 언론자유를 국가에 맞서 수호하는 한편으로 국가적 틀 안에서 미국 사회의 합의된 가치들을 존중하여 ‘통제와 언론자유’의 균형점을 찾아 양 칼을 적절히 구사한 것은 언론통제와 언론자유의 갈등과 조화지점이라는 국가ㆍ정부ㆍ언론의 3자의 입장 모색에 있어 하나의 중요한 사례가 된다.
출처
- 「언론자유와 사회윤리」 수업내용 / 서정우, 2008
- 「한국 저널리즘 어떻게 바꿀 것인가」/ 김익수, 2008
- 「국제공론장과 민주적 정보질서」 / 김성해, 2008
- 평전 「언론 女帝, 캐서린 그레이엄」/ 김택환 <신동아>, 2001
- 네이버 블로그 「국가권력과 매스미디어의 관계」